서효원 학술연구교수
경희대학교 한의학과
“저희 어머니가 갑자기 말씀도 전혀 안하시고, 아무것도 드시질 않아요. 제발 우리 엄마 좀 살려주세요.”
중년의 딸이 머리가 하얗게 센 노모를 휠체어에 모시고 병원 진료실을 찾았다. 어머니가 2달 전부터 식음을 전폐한 채 대화나 활동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전까지만 해도 말씀을 잘 하시고 바깥 외출도 활발하게 하셨는데 어찌된 일인지 영문을 모르겠다고 한다. 보호자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걱정을 쏟아내는데, 환자는 딸과 한의사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관심조차 없어보였다. 환자에게 직접 질문을 던져 보아도 일절 반응이 없고, 대화를 거부하는 상태였다. 이럴 때 과연 우리는 어떤 치료적 접근을 시도해야 할까?
정신과 영역에서도 관찰이 중요하다
정신과 진료는 대화만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기가 쉽다. 아마도 ‘정신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 역시 프로이트의 카우치(등받이가 없는 긴 의자)일 것이다. 실제로 정신과에서 환자 면담을 할 때는 환자들에게 심한 스트레스 요인이 있는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래서 지금 현재 어떤 마음인지를 묻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그런데 마음의 문을 닫고 전혀 이야기를 하지 않는 환자라면? 우리는 두 손, 두 발이 다 묶인 채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것일까?
우리는 위 환자로부터 ‘관찰 가능한’ 것에 집중해서 치료를 시작했다. 보호자가 24시간 상주하면서 환자의 수면시간과 식사량, 배변 활동까지 모든 것을 꼼꼼히 체크했다. 환자의 증상 중에서 가장 시급한 것이 식사 거부였기 때문에 한약과 침구치료를 통해 식사 문제를 개선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우울증을 위한 인지행동치료 매뉴얼에서도 우울증 환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여러 신체 증상들을 설명하면서 수면-식사-배변에 대한 인체의 리듬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흥미롭게도, 이 3가지는 한의사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생리활동들이다.
환자들이 겪는 고통의 실체를 알아야 한다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같은 정신과 진단명은 굉장히 다양한 상태를 아우르는 포괄적 용어(umbrella term)이다. 우울증을 진단하기 위해서는 우울한 기분 또는 흥미와 즐거움의 감소가 필수적으로 나타나야 하고, 그 외에도 여러 신체 및 심리 증상에 대한 기준이 만족되어야 한다. 하지만, 실제 환자들은 진단기준에 포함되지 않는 여러 증상들로 괴로워한다.
일반적으로 진료실에서 많이 듣게 되는 환자들의 리얼한 표현은 다음과 같다. ‘화가 쌓인다’ 혹은 ‘치밀어 오른다’, ‘속을 끓이다’, ‘몸이 무겁다’, ‘몸이 까라지다’, ‘머리가 깨질 것 같다’, ‘속이 메스껍다’, ‘마음을 다스릴 수가 없다’ 등등. 환자들의 괴로움을 단 하나의 진단명으로 완벽히 대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대규모 관찰연구를 통해 현실을 반영하는 결과를 얻어야
이러한 점 때문에 2008년 화병연구센터에서는 화병역학연구를 실시하면서 화병 환자들의 다양한 증상들을 수집했다. 총 93명의 화병 환자가 연구에 참여하였고, 80% 이상에서 화병에서 전형적으로 관찰되는 흉부 증상, 구건/구갈, 두통 외에도 신체통과 안구 피로감을 비롯한 눈의 증상을 경험하고 있었다1).
본 연구결과는 2010년에 발표되었지만,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환자들이 높은 비율로 호소하는 신체 통증(특히 목과 어깨의 통증)이나 안과 증상들은 화병 연구에서 그다지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연구자들이 화병에서만 나타나는 고유한 증상, 특이적 증상들에만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의학정신건강센터에서는 이제 연구를 위한 연구를 지양하고, 현실을 반영하는 연구를 하려고 한다. 그런 일환으로, 정신적 고통 때문에 한방신경정신과 외래를 방문하는 환자들을 300명 이상 모집하여 그들이 겪는 고통을 단면적으로도 조사하고 시간의 경과에 따른 증상의 변화도 추적 관찰할 계획이다. 대규모 관찰연구를 통해 환자들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파악할 수 있게 되면 환자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임상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앞서 말한 관찰 가능한 변수들을 잘 수집하는 것도 관찰연구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다.
환자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같은 것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다시 처음에 소개했던 환자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그 환자는 육군자탕을 복용하고 복부에 뜸치료를 받으면서 식사량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환자를 수시로 찾아가 눈을 맞추고 어떤 치료를 하고 있는지, 그 치료는 왜 하는 것인지, 어떤 호전 반응을 기대하고 있는지 설명하면서 정성을 들인 결과, 한 달 뒤에는 의료진들과 의사소통도 원활해지고 표정도 밝아졌다.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던 환자는 왜, 어떻게 마음을 열었던 것일까?
아이러니하지만, 의료진과 환자 사이에는 공통적인 관심사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환자의 고통이다. 환자를 관찰하고 현재 환자가 처한 괴로움을 정확히 포착해냈기 때문에 우리는 말을 하지 않고도 공감대를 형성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한의사’, 그것이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가 아닐까?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환자에 대한 적극적인 관찰이 중요하다.
참고문헌
1) 김종우, 정선용, 서현욱, 정인철, 이승기, 김보경, 김근우, 이재혁, 김낙형, 김태헌, 강형원, 김세현. 화병역학연구 자료를 기반으로 한 화병 환자의 특성. 동의신경정신과학회지. 2010;21(2):157-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