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4] 엄마로부터 이어받은 화병 : 전염되는 화병
30대 중반의 여성 D는 어머니가 병원으로 데리고 온 환자다.
어머니는 그동안 착했던 딸이 달라진 것 같다고 하면서, 자신에게 폭언과 욕설을 한다고 하면서 이전처럼 딸이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하소연을 한다. 그렇지만, 정작 딸은 그동안 너무 많이 참아왔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이제는 그만 나를 내버려 두었으면 한다고 호소를 한다.
어느새 모녀는 서로 눈만 마주치면 욕과 폭언이 오간다. 엄마가 화를 돋운다며 막말을 일삼고, 딸 때문에 억울하다고 하면서 눈물이 마를 새가 없다. 일상적인 일, 식탁에 마주하여 밥을 먹는 경우도 반찬 하나로 이야기를 꺼내다 보면 서로에게 비난을 퍼붓기 일상이며, 과거의 일화를 하나씩 꺼내면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다툼이 시작된다.
두 사람이 같이 살게 된 것은 3년 전의 일이다. 엄마도 이혼한 상황이고 딸도 역시 이혼을 한 이후 둘만이 남게 되어 같이 함께 살게 되었다.
화의 씨앗은 엄마에게 있었다. 엄마는 오래전 이혼을 했는데, 이혼의 사유는 전남편의 폭력이었다. 20년 넘게 지속되어온 전남편의 가정폭력에 엄마와 남동생은 이유 없이 당했고, 그러한 모습을 아무런 저항이 없이 두 사람이 당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딸이었다. 그런 장면에서는 어쩔 수 없이 그 상황이 끝날 때까지 골방에서 숨을 죽이고 귀를 막고 시간이 지나가는 것을 한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마음속에서는 뛰쳐나가 싸우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지만, 자칫 저항이라도 하면 ‘자식 교육을 어떻게 시켰나’라고 하면서 그 보복은 배가 되어 엄마를 향했다. 마음은 있지만, 저항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스러웠다. 저항을 못 하는 엄마 역시 한스러웠다. 분노는 밖으로 나오지 못한 상태에서 응어리의 강도는 점점 강해졌다. 처음에는 엄마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아무런 저항 없이 그저 당하고 있는 엄마가 원망스러웠고, 심지어는 그렇게 당하는 이유가 정작 엄마의 잘못 때문이라는 생각조차 들었다.
나약한 자신을 탓하던 딸은 엄마와의 관계에서 수동적인 애착 관계가 형성됐고,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친정도 없이 남편의 폭력을 견뎠던 엄마 또한 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둘이 남게 되면 서로에게 의지하였다. 그러나 의지에서 시작된 애착은 때로는 서로에 대한 불신으로 연결이 되었다. 엄마는 딸을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이야기를 하고, 딸은 엄마의 그러한 무능력 때문에 자신도 피해자라고 항변을 한다.
딸은 4년 전, 엄마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결혼하여 아들까지 낳았지만, 정작 자녀를 뺏긴 채 남자와 헤어지고 다시 엄마에게 돌아오게 되었다. 불행의 원인을 모두 엄마 탓이라고 생각하게 된 딸은 집으로 돌아와서는 가장 가까운 존재인 엄마에게 ‘화’를 폭발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젊은 시절 지속되었던 남편의 폭력을 참으면서 딸을 지켜온 것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만, 딸이 자신의 그런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속상해한다. 더구나 그동안의 힘든 삶을 딸로부터 보상받고 싶어 한다. 딸은 폭력적인 가정에서 벗어나고자 결혼을 했지만, 실패한 후에 다시 엄마와 같이 살게 되면서 이렇게 사는 인생이 다 엄마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엄마를 탓한다.
딸과 엄마의 다툼은 이전 남편과 아내의 다툼과 비슷하다. 남편은 이성적인 태도로 늘 아내를 무시하였었다. 한마디 대꾸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엄마의 모습은 딸에게는 무능함에 대한 징표였다. 다시 돌아온 집에서도 그런 문제는 반복이 되었다. 엄마는 늘 잘 견뎌서 이만큼 가정을 꾸려왔다고 자부를 하지만, 딸의 처지에서는 그저 참고만 살아와서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분노한다. 과거의 일을 이야기 하다면서 대화는 늘 같은 얘기로 이어지고, 결국 남는 것은 서로에 대한 비난이다. 같은 피해자로서의 연대감을 가지고 있으면서, 또 서로 간에 의존적이기는 하지만 정작 힘든 상황에서는 서로에게 잘못의 비난을 퍼붓고 있다.
. 화병을 앓으면서 화가 날 때마다 서로에게 책임을 돌리고, 누가 더 심한지에 대하여 다투게 된다.
의존과 연대에 대하여 서로가 공통된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감성적인 엄마와 이성적인 딸은 똑같은 상황에서도 서로 간에 판단이 다르다. 어쩔 수 없이 당했다는 엄마와 그렇게 당했으니 이런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고 딸의 생각은 다툼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과거의 어느 시점을 이야기하면서 그때 그런 행동만 하지 않았으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서로를 비난한다.
인내와 위로가 함께 하면서 세월을 잘 참고 넘어갔지만, 정작 모두가 피해자로서 남게 되면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지금의 현실이 좋지 않으니, 과거의 잘못을 다시금 일깨우게 되고, 결국을 반복되는 다툼으로 이어진다.
엄마의 화병은 딸의 화병으로 그대로 이어졌다. 같은 서러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또 그런 서러움으로 인해 모두 피해자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정작 억울함과 분함은 더하여 더 커지고 분노 역시 화병과 함께 매번 반복되고 있다.
. 서로의 아픔은 확인하고 같은 피해자로서 그동안 잘 견뎌온 것에 대하여 서로 간의 지지가 필요하다.
화병은 엄마가 먼저 앓고 있었지만, 해결하지 못한 문제는 고스란히 딸에게 이어지게 되었다. 참는 것 역시 이어지고 있다. 서로가 연대하면서 견뎌왔지만, 현재의 상태로 과거를 바라보면서 화병은 더 심해졌다. 억울함과 분함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
화병의 극복을 위해서는 현재 상황과 연결하게 하지 않으면서 과거 서로의 노력에 대하여는 다른 평가가 필요하다. 서로에 대한 격려와 이해가 필요한 것이다. 과거의 기억들은 각자의 관점에서 해석이 되는데, 분명한 것은 각자 그 환경에서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다. 엄마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엄청난 인내를 가지고 참아왔던 것이고, 딸 역시 그 상황에서 엄마를 위로했다.
또 서로에게 의존하면서 과거의 부정적인 경험을 반복하는 상황이라면 독립하여 살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서로에 대한 원망보다는 각자의 장점을 확인하는 것이다. 둘 가운데 누구라도 화병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면, 또 다른 한 편도 이를 기반으로 화병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