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3] 분노-불안-우울로 이어진 삶 : 스펙트럼 정신장애
50대 후반의 여성 C는 지금은 아무것도 하기 싫다.
시도 때도 없이 붉어지는 얼굴과 열감, 가슴의 답답함, 여기저기 나타나는 통증으로 견디기 어렵다. 지금까지 왜 참고 살았는지 남들은 뭐라고 하지만, 그럼 어떻게 살면 되냐고 반문을 하고 싶다. 어느새 늪에 빠진 것 같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어린 시절 별다른 일은 없었다. 그저 일상에서 남들처럼 열심히 살아왔다. 근면과 성실, 그리고 참고 지내는 것을 어릴 적부터 배워왔다. 결혼하고 나서도 잘 지낼 수 있었다. 가정을 위해 정말 열심히 살았었고, 남편의 회사 출근과 자녀의 교육에 최선을 다하면서 그저 정신없이 살아왔다. 그런데, 남편의 외도 사건이 발생했다. 자신은 가정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면서 살아왔다고 생각하는데, 남편은 다르게 살아오고 있었다. 남편은 사소한 일이었다고 하면서 용서를 구했지만, 지나온 세월을 생각하니 분노가 가라앉지 않고 도저히 용서되지 않았다. 자신은 오로지 가정을 위해 열심히 10여 년간 묵묵히 살아왔는데, 외도라는 현상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남편의 백번도 넘게 사과를 했지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억울함과 분함이 있을 뿐 아니라, 반복하여 떠오르는 생각이 계속 괴롭혔다. 그렇지만 정작 치료를 받아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도리어 누군가에게, 특히 자녀에게 알려질까 두려워 그저 숨기면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도 자꾸 떠오르는 생각에 괴로웠지만, 더욱더 괴롭게 만드는 것은 마음속 갈등이었다. 용서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억울함과 분함으로 쉽게 용서가 되지 않고, 더구나 가정을 지켜야 하는가에 대한 반문이 이어지게 되었다. 마침 아이가 아직도 어린 시절이었기에 내가 참고 견뎌야 한다는 결론을 어쩔 수 없이 도출하였다. 이혼을 몇 번 생각해보았지만, 아이들이 있어서 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남편이 이전보다는 잘해 주어 때로는 이제는 잘 살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 생각이 들면 언제든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불안했다. 이러한 불안은 행동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남편에게 수시로 전화를 걸어 확인하고, 또 집에 조금이라도 늦게 오면 다툼이 반복되었다. 남편은 이런 행동에 꼼짝달싹 못 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다가도 어느 때면 이제 그만할 수 없냐 하면서 불만을 터뜨리고 이런 날이면 늘 싸움으로 이어졌다.
시간은 꽤 흘렀다. 첫 충격이 10년이 지난 시점에도 일상생활을 잘하고 있는 듯하다가도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도 하고, 또 불안이 스믈스믈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생활을 이어가고, 어느새 자녀들이 크면서 할 일도 그만큼 줄어들었다. 그렇게 할 일이 줄어들면서 무기력감은 더 커져만 갔다. 억지로 참고 살아왔지만,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만나고 있다. 그동안 자녀 때문에 살아왔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는 점점 아빠 편이 되어 갔다. 나를 무시하고, 능력 없는 여자라고 몰아붙이기도 하였다. 무기력감이 밀려오고, 이전에 남편에게 쏟아내었던 분노도 이제는 힘을 잃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남은 것은 신체 증상이다. 정신적으로 보면 그동안 반복되었던 분노나 불안보다는 무력감과 우울이 더 심한 듯하다. 갱년기 이후에 생겼던 증상들은 고스란히 남아 벌써 5년 이상 지속이 되고 있다. 몸의 후끈거림과 상열감, 가슴의 두근거림과 답답함, 관절 여기저기를 왔다 갔다 하는 통증들. 산부인과에서의 갱년기 장애, 류머티즘내과에서의 진단, 갑상샘 기능항진 등 여러 진단도 함께하고 있다. 그렇지만, 진단만 내려졌을 뿐 별다른 호전은 없다. 정신과에서는 우울증, 한의원에서는 화병이라는 진단을 받고는 있지만, 별다른 기대도 없다. 이런 삶을 살아온 지 너무 오래되어 나을 희망도 없다.
환자가 병원을 방문한 시기에는 증상만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동안 분노, 불안, 우울의 시기를 겪으면서 어쩔 수 없는 반응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정작 이렇게 여기저기 아프고, 일상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니 이전의 감정이 하나둘씩 꿈틀거리며 나타나는 것이다.
. 오래된 화병이 있는 사람들은 여러 감정을 겪어왔다.
화병의 시작은 분노이지만, 결과는 여러 가지 고통이다.
화병은 억울하고 분함으로 발생하기 때문에 외부 자극에 대한 분노 반응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렇지만, 분노의 감정을 오랫동안 지속하기는 어렵다. 분노의 감정의 불의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폭발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 힘이 줄어들게 된다.
분노에 이어서 갈등이 벌어진다. 갈등은 기본적으로 그 상황을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물론 그 상황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있을 수 있겠지만 자신의 환경에서 이를 벗어나지도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삼키지도 못하고 토하지도 못하고 목에 딸 걸려 있는 그런 상태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불안이라는 정서가 발생한다. 안정되지 못한 상황이다. 안절부절의 상황이다.
그런 상황이 오래가다 보면 견딜 힘이 없는 탈진의 상황에 놓이게 된다. 지켜서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 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욕구마저 없어지는 상황에서 우울증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후에는 여러 증상이 발생하게 된다. 의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증상들이다. 대표적인 것이 통증이다. 두통과 같이 특정 부위에 나타나기도 하지만, 여기저기의 통증, 그야말로 고통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 화병의 극복을 위해 나의 위치를 알아본다.
정신장애를 스펙트럼의 측면에서 볼 때, 현재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볼 필요가 있다,
스펙트럼은 일생에 걸쳐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보다 훨씬 짧은 주기로 나타나기도 한다. 젊은 시절의 분노, 이후의 불안, 중년 이후의 우울 같은 경우는 일생을 지배하는 큰 리듬이다. 그렇지만, 일주일에 한 번, 때로는 하루에 한 번처럼 분노, 불안, 우울이 짧은 주기로 반복되기도 한다.
자극에 대하여 나타나는 분노 반응,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고 갈등하는 불안,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서 포기하는 우울은 그리고 결과물로 드러나는 고통이다. 지금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는가를 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자신의 감정은 어떠한가? 를 생각해보면 역으로 자신이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