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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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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효원 칼럼 / 한의신문] “세상에 나쁘기만 한 감정은 없다”

관리자 2022-04-12 조회수 525

서효원 학술연구교수

경희대학교 한의학과


 

“스트레스가 있으신가요?”

스트레스란 적응하기 어려운 환경에 처할 때 느끼는 심리적, 신체적 긴장 상태를 의미한다. 한방신경정신과 외래에서는 환자의 주호소, 현병력, 과거력 등 일반적인 병력청취를 하고서 환자에게 과거나 현재의 스트레스 사건을 확인한다. 스트레스 사건의 유무에 따라서, 스트레스원의 종류나 특성에 따라서 환자들의 예후도 다르고 상담의 방향도 달라진다.

스트레스라는 용어는 일상에서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원인과 반응을 모두 일컫는 용어로 구분 없이 사용되고 있지만, 엄격히 말하면 스트레스와 관련된 개념은 스트레스의 원인과 반응으로 나누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스트레스 이론

과학적으로 스트레스의 개념을 가장 먼저 제시한 사람은 오스트리아 출생의 캐나다 내분비학자 한스 셀리에(Hans Selye)로, 스트레스를 일으키는 인자 또는 자극을 ‘스트레스원(stressor)’이라 하고 스트레스원에 의한 유기체의 비특이적 반응을 ‘스트레스(stress)’로 명명하였다. 

미국의 심리학자 리처드 라자루스(Richard Lazarus)는 스트레스원을 결과에 따라 부정적인 ‘디스트레스(distress)’와 긍정적인 ‘유스트레스(eustress)’로 구분하였다. ‘유스트레스’는 업무의 수행에 오히려 도움을 줄 수 있는 기분 좋은 자극을 의미하는데, 좋아하는 일에 몰입할 때 느껴지는 기쁨이나 미래에 대한 기대로 설렘을 느끼는 것 등이 ‘유스트레스’의 긍정적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스트레스는 부정적인 반응을 야기하는 ‘디스트레스’이다. 건강을 망치는 부정적 스트레스는 그 지속시간에 따라 급성 스트레스 반응(acute stress response) 또는 일반적응증후군(general adaptation syndrome)이라는 결과를 낳는다.


급성 스트레스 반응은 분노와 불안과 연관

급성 스트레스 반응이란 치명적인 위협에 대한 소위 ‘투쟁-도피 반응’을 의미한다. 스트레스를 느끼면, 우리 몸에서는 즉각적인 생리학적 반응이 일어난다. 스트레스 지각은 교감신경계를 활성화시키고, 스트레스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신체적으로 준비를 시킨다. 월터 캐넌(Walter Cannon)은 이러한 반응을 ‘투쟁-도피 반응’이라 명명했다. 이 반응은 매우 즉각적으로 나타나는데, 여기에 동반되는 지배적인 정서는 각각 분노와 불안이다.

분노는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

투쟁은 일반적으로 자신이 입은 피해를 앙갚음하겠다는 생각과 함께 일어난다. 모든 정서가 그렇지만, 분노라는 정서는 매우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으며 여러 사고와 결합되는 특성을 가진 독특한 감정이다.

생물학적 반응으로서의 분노는 자극이 사라지면 수초~수분 내에 가라앉지만, 실제로 사람들의 분노는 짧게는 하루, 길게는 수십년까지 이어지기도 하고 화를 쉽게 누그러뜨리지 못하고 극도의 분노 때문에 뒷목을 잡고 쓰러지기도 한다. 

‘동물에게도 화병(火病)이 존재할까?’라고 질문해보면, 인간의 분노는 생물학적 반응을 넘어서는, 인지와 관련된 복잡한 감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합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미루어 짐작컨대, 인간의 분노는 동물의 분노보다 훨씬 더 다양한 차원(dimension)과 강도(severity)로 나타날 것이다. 인간의 분노는 자신이 온전히 인정받기 위한 욕구에서 비롯되며, 인간성이 존중될 때 해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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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감정

투쟁-도피 반응 중 도피는 위협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모든 신체기능을 집중시키는 것이다. 산에서 멧돼지를 만나거나 곰을 만났을 때, 36계 줄행랑을 치는 상황을 생각해보면 된다. 

심지어는 실제적인 위협이 없더라도 ‘대중들 앞에서 발표를 망쳐서 망신을 당할 것 같은데 어떡하지?’, ‘내가 갑자기 지하철에서 쓰러지면 어떡하지?’와 같은 미래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우리 몸에서는 경보를 울리고 즉각적인 도피 반응을 일으킨다. 즉, 위협 그 자체보다는 위협에 대한 지각과 인식이 중요하다.

앞서서 분노는 앙갚음을 하려는 생각과 연관이 된다면, 불안은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겠다는 생각과 동반된다. 비유하자면, 불안은 연약한 아이를 돌보는 어른의 마음이다. 자신이 충분히 안전한 상태라는 것을 인식하고 안심하게 되면 불안은 정상 수준으로 회복된다. 


만성 스트레스는 우울과 관련

만성 스트레스의 결과는 셀리에가 제시한 일반적응증후군 모델을 통해 이해를 넓힐 수 있다. 심리적이고 물리적인 스트레스가 지속되면 시상하부, 뇌하수체, 부신피질 축의 호르몬을 변화시키고, 각종 질병으로 이어지는데 셀리에는 이것을 일반적응증후군으로 명명했다.

일반적응증후군은 경고반응-저항-소진이라는 3단계로 나누어진다. 인체 항상성에 의해 스트레스 반응이 조절되지 않고 소진 단계에까지 이르면, 적응 에너지가 소진되고 심장병, 편두통, 위궤양, 고혈압 등의 질병 및 사망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심리적으로는 자포자기나 우울감 및 불면증 등이 생기게 된다.


우울은 회복을 위한 감정

우울은 상실을 경험하거나, 에너지가 고갈되었을 때 우리가 일반적으로 느끼는 감정이다. 병리적인 우울증 상태에서는 생리적 기능이 현저히 떨어지고 의욕이 바닥나 있어 우리를 병들게 하지만, 일정 수준의 우울은 회복을 촉진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든다. 달리 말하자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와 가장 잘 어울리는 감정이 바로 우울이다.


스트레스 반응으로서의 감정

스트레스에 대한 결과로 생리적 반응, 신체 증상 등이 다양하게 일어나지만 정신과에서 특히 관심을 보이는 영역은 바로 감정이다. 인간은 스트레스에 대응하여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고 여러 대처전략을 펴는데, 그중에 감정도 하나의 전략이자 결과가 된다. 스트레스 이론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부정적인 정서라고 인식되는 분노, 불안, 우울도 정상적인 반응으로 나타날 수 있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는 실마리가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환자의 스트레스를 다루고 감정의 문제를 다룰 때, 부정적 정서를 무조건 나쁜 상태, 병적인 상태로만 볼 것이 아니라 환자의 회복탄력성을 키워 항상성을 유지하는 상태를 구현할 수 있을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한의학상담의 중요한 주제가 될 수 있다.